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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리되지 않는 존재 > 시리즈 

작가노트  /   윤한종

‘본질’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이 그 사물 자체가 되게하는 원래의 특성’이다. 일반적으로 ‘본질’이라는 것은 그것의 진실, 진리, 대표성으로 인식되고 규정되는 듯하지만, 실상 본질은 불변의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의 목적, 물리적인 구성, 존재 이유, 행위의 동기 등 관점과 맥락에 따라서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다.

 

사람은 필요에 따라 사물을 만든다. 사물의 색상을 결정할 때에, 사회적 규범이나 문화에 근거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 색상으로 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사람이 추구하는 목적 즉, 아름다움이나 주위와 어울리기 적합한 것으로 정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전자부품은 외부에서 보이는 색상보다 기능과 성능이 중요한 특징이며 본질이다. 하지만 ‘본질’의 의미가 ‘물질이 존재한 원래의 그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전자부품의 색상은 아무런 목적과 구속을 받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전자부품을 구성하는 물성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처리되지 않은 존재’(Untreated Beings) 연작은 본질(Nature)과 변태(Metamorphosis)라는 두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있다. 본질(Nature)은 아주 작은 전자부품을 마주하면서 ‘원래의 그것의 모습과 색상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변태(Metamorphosis)는 ‘원래의 그것이 아닌 대상이 전혀 다르게 변질된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궁금증이 빚어낸 상상과 추측에 기인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고유 색상을 지닌 전자부품에 상처를 입히고 변형시켜서, 기계장치에 속한 삼원색(三原色) 빛의 다양한 밝기에서 촬영하여 불규칙과 우연성을 고려하여 재현하였다.

 

본 연작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나의 원래의 그것, 원래의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원래의 그것이 아닌 다른 나는 어떤 모습인가? 등 실타래처럼 정리되지 않은 나의 본질에 대한 질문(質問)과 반문(反問)에 대한 유희적 탐구, 탐구적 유희로 진행해 온 과정이며 결과이다.

평론/
기계의 눈과 인간의 눈이 만나는 지점:
윤한종의 <Nature>시리즈와 <Metamorphosis>시리즈

 

이영준 <기계비평가>

 

매우 즉물적으로 보이는 윤한종의 <Nature> 사진 시리즈는 의외로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테크놀로지 시대에 인간이 기계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테크놀로지도 그냥 테크놀로지가 아니다. 인간의 세포조직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있어서 어디까지가 인간적인 것이고 어디부터가 기계적인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테크놀로지를 말하는 것이다. 20세기까지의 기계들이 정밀화, 고성능화를 지향했다면 21세기의 기계들은 지능화와 집적화를 지향하고 있다. 이제 기계의 화두는 ‘성능이 얼마나 좋은가’가 아니라 ‘인간과 얼마나 잘 소통하여 인간의 감각에 파고들어 새로운 기계세상을 열 수 있을까’이다. 이제 인간과 테크놀로지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이런 판국에 인간은 테크놀로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 윤한종은 전자소자검사기를 이용하여 한 가지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윤한종의 접근법은 소자검사기를 직접 만들고 파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기계에 대해 정통하다. 그는 기계가 가진 힘을 이용하여 기계가 실토하게 만든다. 기계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말이다. 초정밀접사로 바싹 다가가 찍은 소자들은 무한의 우주공간을 연상시키는 검은색 공간을 배경으로 떠 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돼 있는 모습이다. 윤한종이 쓰는 방식은 기계적 내러티브는 완전히 괄호 속에 넣어두고 오로지 무한히 검은 배경 속에 떠 있는 소자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면서 사진의 가장 고전적인 힘을 빌리고 있다. 그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수록 대상은 더 초현실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기계의 인간화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윤한종이 개발한 소자검사기는 철저히 자체의 논리로 돌아가는 기계이지 인간이 개입해서 작동시켜주는 부분이 전혀 없다. 오늘날 산업현장을 가보면 인간의 모습을 거의 볼 수가 없는데 소자검사기도 마찬가지다. 윤한종이 한 거라고는 그 기계가 찍은 사진 중 하나를 크게 확대하고 색채를 강조한 것뿐이다. 즉 사물 스스로 자신을 대변하게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사물들은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번쩍거리고 구불거린다.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이상한 기운이 원래 소자에 들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렌즈와 조명의 특성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지 자체의 특성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셋 모두가 합쳐진 기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사진들에서는 마치 분자 단위까지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는 듯한 신비감이 느껴진다. 이 사진들은 더 이상 전자회로의 소자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선의 연습을 위한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나를 실험하는 것이다. 기계는 사진에서 오로지 불량률만 찾아내지만 사람의 눈과 감성은 거기서 슬픔을 보기도 하고 우주를 보기도 하는 등 쉽사리 축소해 버릴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본다. 윤한종의 사진은 개별 소자들을 그런 스펙트럼의 세계를 향해 활짝 열어놓는다.

그런데 <Nature>시리즈와 또 다른 시리즈인 <Metamorphosis>의 관계는 참으로 묘하다. 얼핏 보면 <Metamorphosis>시리즈는 단순히 <Nature>시리즈에 나오는 개별 소자들을 잔뜩 모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소자들의 숫자가 아주 많아지니까 질적 변화가 온다. 변증법에서 말하는 양질전환의 법칙에 따라서 양적인 변화가 축적되면 질적으로 변화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Metamorphosis>는 ‘변형’, ‘변태’, 혹은 ‘변신’이라는 뜻답게 개별 소자는 이 시리즈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너무 작아서 알아볼 수도 없고, 이미 하나의 거대한 전체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개별성은 사라지고 만다. <Metamorphosis>시리즈에서는 어떤 변신이 일어나고 있을까? 일단 소자들의 색이 다 달라서 아른거리기 때문에 마치 아지랑이가 움직이듯 잘게 떨리는 듯한 광학적 착시효과(optical illusion)를 만들어낸다. 이제 소자는 더 이상 소자가 아니라 우주공간에 흩뿌려진 별들의 집단이나 해변의 수많은 모래알 등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인다. 소자는 세포가 되기도 하고 분자가 되기도 하고 원자가 되기도 하는 등 자유롭게 떨리며 이미지의 스펙트럼을 스스로 꾸며낸다. 그 스펙트럼이 보는 이의 망막에 닿으면 수만가지 착시효과를 내며 다른 존재로 탈바꿈한다.

그러면서 기계미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바뀐다. 흔히 기계라고 하면 사람들은 뭔가 고정적인 것, 인과적인 것을 생각하게 된다. 즉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들어오듯이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라나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Metamorphosis>시리즈는 고정직이지도 않고 인과적이지도 않다. 기계의 인간화란 기계를 억지로 조작해서 인간을 위해서 봉사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기계의 인간화란 기계를 인간이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으며 인간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철저히 공식과 계산에 의거해서 만들어진 기계와 온갖 편견과 오류의 원천이 공존하려면 중간에 뭐가 있어야 한다. 윤한종의 시리즈들은 바로 그 중간지점이다.

기계적으로 보면 <Nature> 시리즈는 소자들을 정지해 놓고 고배율로 찍는 관찰의 시선을 구현하고 있다. 흔히 반도체 웨이퍼를 검사할 때 이 기법을 쓴다. 반도체 칩은 지름 300mm 정도되는 실리콘 웨이퍼 위에 흡사 판화의 에칭기법을 닮은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웨이퍼는 수없이 많은 깨알만한 반도체 칩을 품게 되는데 이것들을 다 검사하기 위해 정지카메라를 쓰게 된다. 카메라는 7배에서 최대 12배에 이르는 고배율로 웨이퍼의 표면을 훑으며 불량을 찾아낸다. 즉 윤한종은 이 카메라의 눈을 빌려 자신의 작업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Nature> 시리즈에서는 시간이라는 축은 정지된 채 작동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치밀하게 뚫어지도록 들여다 보는 시선만 존재한다. 반면 <Metamorphosis> 시리즈에 쓰인 방법에서는 소자들을 마구 훑고 지나가는 시간의 축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0.6mm에서 3.2mm에 이르는 소자들을 1분에 최대 8천개까지 검사하는 시스템에서는 재빨리 사진 찍고 재빨리 판단하는 것이 생명이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사진들은 전체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결함을 나타내는 픽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사진 하나의 크기는 VGA급인 640×480의 해상도를 갖는 30kb에 지나지 않는다. <Metamorphosis> 시리즈는 그렇게 나온 이미지들의 시간의 축을 평면 위에 펼쳐놓은 것이다. 이미지들은 무작위로 나열되어 적게는 10,000개에서 많게는 700,000개의 모자이크를 이룬다. 제대로 조립되었다면 잘 기능할 다양한 전자기기가 됐을 소자들은 이 시리즈에서는 이미지의 픽셀로 변환된다. 각각의 소자들은 윤한종의 손에 의해 화학적으로 부식시킨 것이기 때문에 원래 가지고 있지 않은 색깔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Metamorphosis> 시리즈에 나오는 소자들은 더 이상 소자가 아니라 색의 단위, 혹은 점묘파 화가의 수많은 점을 닮기도 한다. 그것은 오늘날 사물이 실체성을 잃고 이미지로 변환되버리는 오늘날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보는 이에게 <Metamorphosis> 시리즈는 알 수 없는 거대한 픽셀들의 현란한 군무로 보이겠지만 윤한종은 각각의 소자들이 무엇인지, 그것을 사진 찍은 검사기 시스템의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자세히 알고 있다.

 

결국 <Metamorphosis> 시리즈에서 작가의 지식과 관객의 무지식(혹은 무지)이 정면으로 충돌한다. 설사 작가가 관객에게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를 다 설명한다고 해도 관객은 이해할 수 없으니 작가와 관객 사이에는 깊은 이해불가능의 심연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그때 관객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감상 이외에는 없다. 결국 감상의 눈으로 보면 메커니즘의 산물도 아름다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 <Metamorphosis> 시리즈는 어떻게 보면 점묘파 회화를 닮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김환기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를 닮기도 했다. 김환기는 뉴욕에서 이 그림을 그릴 때 온갖 그리움의 상념을 담아 점 하나하나를 찍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점들은 다들 뭔가 사연을 품고 있는 듯 하다. <Metamorphosis> 시리즈를 이루는 소자들의 픽셀들에도 사연은 많다. 그것은 철저하게 기계적인 사연들이다. 저항은 전기의 흐름을 막고, 콘덴서는 전기를 응축하고, LED는 빛을 낸다. 각각의 소자들은 회로의 어디에 꽂히는가에 따라서 다른 기능을 하게 된다. 그런 기능들이 하나하나 맺혀서 소자와 픽셀의 사연이 된다. 그런데 수만개 수십만개의 사연은 무엇이 될까. 여기서부터 관객의 몫이다. 수십만개의 픽셀의 합을 하나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고 몇몇 픽셀을 골라서 뚫어지게 볼 수도 있다. 전자회로에 들어가는 소자에서 시작해서 검사기라는 복잡한 시스템의 시선에 갇혔다가 작가에 의해 하나의 시리즈가 된 픽셀들은 관객의 눈과 상상력 속에서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궁극의 변형을 거치게 된다. 그게 <Metamorphosis> 시리즈의 열려 있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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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존재 > 시리즈 

© YOON HANJONG

작가노트  /   윤한종

사진은 물리적인 존재를 기록하기 위한 발명 도구이다. 사진가들은 사진이 발명된 이후로 오랫동안 동시대의 주요사건과 대상을 광학적 한계 내에서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 광학적 한계 때문에 사진의 기록은 겉으로는 정확한 듯 보여도 완벽한 진실이 될 수 없다. 다만 사진이 촬영자가 관찰하고 인식한 사유의 결과물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자연계의 모든 것은 고유의 기능과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는 인간의 시각적 한계 내에서만 인식된다. 따라서 너무나 작은 존재는 사람이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각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유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기계장치를 이용한 고배율 사진은 대상에 대한 충분한 시각정보를 제공하여, 보이지 않는 존재(Invisible Beings)를 볼 수 있는 존재(Visible Beings)로 인식하게 한다. 또한, 미소(微小)하여 개념적으로만 여겨지던 존재(Conceptual Beings)를 실재적 존재(Real Beings)로 편입시킨다.

 

보이지 않는 존재(Invisible Beings)는 개인 연작(Individual Series)과 사회 연작(Society Series)으로 나뉜다. 개인 연작은 고정도 산업용 카메라를 이용하여 1-4mm 크기의 양품 또는 불량 전자부품을 고배율로 촬영했다. 극단적으로 확대된 정물은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볼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사유하게 한다. 이 작업은 전자부품이 사람과 비슷하다는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내면은 실수와 실패, 상처와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 연작은 10,000개의 전자부품을 각 1회씩 촬영하고, 각각의 사진을 오려서 100×100 형식으로 나열한 작품이다. 10,000개의 부품은 개인들이 부대껴서 사는 사회를 의미하며, 각 부품을 실패의 경험을 가진 상처받은 개인이라고 생각하며 작업하였다.

 

작업 대상인 전자부품은 나에게 있어 오래전부터 생업의 한 요소에 불과했으나, 보이지 않는 존재(Invisible Beings) 작업을 하는 동안 관찰과 사유를 통해 성찰의 대상으로 다시 다가왔다. 이런 대상의 재현은 산업적 목적에 부합하는 이미지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롭게 발견된 존재이며,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빛에 대한 생경한 경험의 표현이다. 이 연작이 관람자들의 생각과 다를 수도 있겠으나, 함께 이 시대 모습에 대해 고민하는 화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평론 /
기계의 욕망을 시각화하다

이영준(기계비평)

 

“눈아, 본 것을 부정해라!”

―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중에서

 

사진 전시 서문에 꼭 “아무개 사진가는 단순히 사물의 재현을 넘어서” 운운하는 작자들이 있다. 그런 분들을 위해 “단순한 사물의 재현”이 왜 단순한 문제가 아닌지 말하고자 한다. 사람 눈으로 보는 사물과 기계가 재현해 내는 사물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은 사람 눈에 재현된 사물보다 다양한 기계적 영상처리 기술을 통해 재현된 사물이 훨씬 정확한 시대다. 기계적으로 사물을 정확히 재현해 내는 것은 긴 역사를 통해 복잡하게 발전해 왔다. CT, OCR, 핵자기공명, 인공위성에서 보내온 영상, 자동차번호판이나 우편물에 쓰여 있는 주소를 인식하는 문자인식기, 까마득히 먼 천체를 관측해서 해석해 내는 알고리즘 등을 통해 기계적 시각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발달해 있다. 이제 사물이란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판단하는 수준을 넘어 초미세, 초원거리의 차원으로 확대되어 있다. 인간 신체의 일부인 육안의 차원을 넘어 존재하는 사물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것은 더 이상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천문학자들은 몇십억 킬로미터 떨어진 천체를 찍은 픽셀 몇 개 안 되는 영상을 분석해 내는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이제 사물이란 눈앞에 주어진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사회적 필요성, 인지적·인식론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필요성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하나의 계를 이루고 있다. 단순한 사물 하나에도 인류사 전체의 진화 방향이 응축돼 있다. 하나의 돌멩이는 지질학자의 눈에는 지구의 역사가 담겨 있는 데이터베이스이며, 그것을 읽어 내기 위해서는 지질학의 역사 전체가 필요하다. 하나의 볼펜에는 정확하게 오래 쓰고자 하는 필기구의 오랜 역사가 담겨 있으며 붓글씨를 넘어서는 글자의 오랜 역사가 담겨 있다. 또한, 볼펜을 싸게 대량으로 보급하고자 하는 산업의 역사도 얽혀 있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이 세상에 ‘단순한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한 재현’이란 더더군다나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개미 한 마리는 단순히 벌레 한 마리였으나 지금은 개미를 통해 사회성을 연구하고 생화학적 연구를 통해 항암물질을 찾아낸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자구조를 시뮬레이션하는 컴퓨터의 알고리즘도 개입해 있다. ‘하나의 먼지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는 말은 먼지의 여러 가지 차원을 분석해 낼 수 있는 오늘날 타당성을 얻고 있다. 그러니 이제 “아무개 사진가는 단순히 사물의 재현을 넘어서” 하는 클리세는 제발 사라졌으면 좋겠다.

사물의 재현 수단인 카메라도 길고 복잡한 노력의 산물이다. 렌즈의 수차를 없애기 위해 컴퓨터로 설계되고 기계가 깎아 내는 유리렌즈를 여러 장 겹쳐서 쓰고 있으며, 정확한 노출을 측정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분석하여 통계를 내고 그 결과를 토대로 컴퓨터로 노출치를 제어하고 있다. 카메라에 내장된 복잡하고 정교한 회로가 전자파의 간섭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마그네슘 등의 금속으로 된 바디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 카메라는 일상적 용도나 예술 외에도 의학, 기계공학, 토목측량, 범죄수사, 군사 분야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이런 분야에서 영상을 다루는 방식은 다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눈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람의 눈은 부정확하고 주관적이며, 편견과 오류의 간섭을 받으며 쉽게 피로해진다. 가끔 사람의 눈이 정확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직관이나 감성과 연관될 때이다. 아기는 자기 엄마의 생김새를 정확히 서술할 수 없어도 직관적으로 엄마를 찾아낸다. 아이에게 고양이 그림 몇 개만 보여주면 다르게 생긴 고양이라도 금방 고양이라고 알아맞힌다. 인공지능에는 아직 이런 지능은 없다고 한다. 이렇게 특별히 직관과 감성에 의존하는 분야 외에 산업에서 직관과 감성에 의존하여서 해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람의 눈이 가진 결정적인 단점은 대상에 대해 지나치게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즉 대상이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어떤 것과 닮았으면 ‘그것’이라고 단정을 지어 버린다. 1976년 화성 탐사선 바이킹이 찍어 보낸 사진에서 화성 표면에 사람 얼굴이 있다고 해서 호들갑을 떤 적이 있으나 그것은 먼 천체에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으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하는 주관적 편견에 의한 오류였을 뿐이다. 사물을 ‘인간적으로’ 보고자 하는 그릇된 소망 때문에 단순한 바위 무더기가 사람 얼굴로 보였던 것이다. 기계의 눈은 이런 식으로 동일시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에 기초해서 계산해 내서 판단할 뿐이다. 따라서 기계가 눈을 부정한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눈은 많은 부가장치의 도움으로 타고난 생물학적 차원을 떠나 기계적 차원에서 존재했는지도 모른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천리안’은 오늘날 레이더를 이용해서 대폭 탐지 범위가 늘어난 기계적 지각 능력의 전조이다. 어차피 인간이 저 지평선 너머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기 시작한 이후로 눈은 그리 쓸모 있는 탐지장치는 아니었다. F22 랩터 같은 첨단 전투기는 데이터 링크 기능이 있는데, 이는 앞에 있는 전투기의 레이더가 탐지한 데이터를 뒤에 있는 전투기에 링크해 주는 기능이다. F22의 AESA 레이더의 탐지거리는 370km인데, 앞에 있는 전투기가 후방에 있는 전투기에 데이터를 링크해 주면 탐지거리는 몇 배로 늘어나게 된다. 이는 본대가 가기 앞서서 척후병을 보내 앞쪽에 있는 상황을 파악한 후 전진하던 옛날의 전술을 오늘날 디지털로 최첨단화한 것이다. 결국, 인간의 눈이 기계에 의해 부정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 사람의 눈이 가지는 한계, 그리고 생물학적 눈이 가지는 한계 때문이다.

 

엔지니어이자 사업가이자 작가인 윤한종은 기계의 눈이 어디까지 볼 수 있나 알아보기 위해 자신이 다루는 전자부품 비주얼 검사장치(이하 검사장치로 표기)의 정밀한 눈을 이용해 인간의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미세한 전자부품들을 사진 찍었다.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이 사진들은 오늘날 기술과 시각과 인지에 대한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우선, 이 사진들이 나오는 과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과는 매우 다르다. 물론 이런 기계로 사진 찍는 목적도 다르다. 보통의 사진을 하는 작가들에게 사진 찍는 목적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단히 애매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흔히 하는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혹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기 위해서’ 혹은 ‘어떤 대상의 아카이브를 만들기 위해서’ 같은 대답들은 대단히 애매할뿐더러 대답한 본인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이런 언어들의 잘못된 점을 일일이 지적할 필요는 없지만 맨 앞에 있는 것만 짚고 넘어가자. 흔히 역사를 기록한다고 할 때 저기 어디에 역사가 있어서 카메라로 찍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카메라 자체와, 그것을 들고 있는 사진가도 정신없이 흘러가는 역사 시간의 급류에 같이 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사를 기록한다’는 말처럼 잘못된 말이 없다. 즉 카메라로 기록할 수 있는 역사란 저 앞에 멈춰 있는 피사체가 아니라 카메라와 사람과 시간을 둘러싼 정신없는 다축적 운동이다. 카메라와 사람도 그 역사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마치 역사가 저기 앞에 멈춰 서 있는 것처럼 기록한다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임응식의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역사 시간과 지금 스마트폰의 디스플레이에 나타난 시간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사진 속의 역사 시간은 작가×표상×제도×담론×관심×이해관계 등 복잡한 것이 얽혀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상상 이상으로 복잡한 장치를 필요로 한다. 즉 역사로부터 거리를 띄우거나 그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담론적, 감각적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사진의 장치가 역사의 일부인데 어떻게 역사가 저기 떨어져 있는 피사체인 것처럼 기록한단 말인가? 내면을 탐구하거나 아카이브를 만든다는 황당무계한 담론들도 마찬가지다.

반면, 윤한종이 전자부품 검사장치를 이용해서 찍는 사진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전자부품의 표면에 있는 결함을 찾아내는 것이다. 옛날에는 제품의 결함을 사람의 눈으로 찾아냈지만 이제 산업현장에서 사람의 눈으로 무엇을 검사하는 시대는 지났다. 옛날에는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하면 검수원들이 망치로 대차와 차륜을 두드리면서 혹시 모를 균열 같은 것을 탐지했지만 요즘 그런 검사는 하지 않는다. 초음파나 레이저를 이용한 비파괴 검사가 훨씬 정확하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기계의 감지 능력이 사람 눈의 감각 능력을 훨씬 앞섰기 때문에 육안에 의존하는 검사는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눈은 시각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스캐너가 아니다. 그것은 신체의 일부이며, 생리적으로 작용하고, 데이터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뇌의 명령과 간섭을 받아 받아들인 데이터를 조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졸리면 닫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데이터를 조작하기도 한다. 당구를 많이 치면 천장의 벽지 무늬가 온통 당구공으로 보인다는 얘기는 농담이 아니었다. 사람 눈의 특성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그렇게 감정과 감각과 편견에 사로잡힌 눈은 산업에 이용하기에는 너무 부정확하다. 그래서 기계의 눈이 사용되는 것이다.

전자부품의 표면에 있는 결함을 찾아야 하는 이유와 절차는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다. 그것은 오늘날 복잡하게 발달한 산업의 중요한 측면을 품고 있다. 우선, 왜 결함을 찾아내야 할까? 사실 윤한종의 검사장치가 다루는 전자부품의 단가는 별로 비싸지 않다. 몇천 원에서 심지어 몇 원, 전 단위로 내려가는 부품도 있다. 문제는 작은 전자부품의 결함 때문에 고가의 기계장비 전체가 못 쓰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자부품의 불량률은 그것을 제조한 회사의 신뢰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결함은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컴퓨터에서 스마트폰을 거쳐 다리미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쓰는 전자기기에는 수많은 전자부품들이 들어 있다. 어떤 것은 크기가 몇 밀리미터에 이르는 큰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깨알의 몇 분의 일밖에 안 될 정도로 작은 것들도 있다. 우리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전자부품이 그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자부품에는 일정한 불량률이 나타난다. 이 불량을 찾아내는 검사는 고속으로, 고정밀로 이루어진다. 검사장치가 찾아내는 것은 사실 불량 자체는 아니다. 검사장치는 칩의 외관을 검사할 뿐이다. 즉, 칩의 형태, 크기, 색, 질감에 불규칙한 점이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다. 기계의 눈이 사람의 눈과 다른 점은 기계의 눈은 자기가 관심 있는 것만 본다는 점이다. 전자부품 검사장치는 자신이 검사하는 칩이 콘덴서인지 저항인지 관심 없다. 그리고 칩이 불량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검사장치는 정해진 규격을 벗어난 것을 찾아낼 뿐이다. 칩의 크기가 설계치수와 허용공차를 벗어난 것을 불량으로 처리할 뿐이다. 따라서 검사장치의 눈은 이것저것 다양한 관심사에 사로잡혀 있고 두뇌의 지식과 관심사에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의 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요즘 운동경기에서 비디오 판독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 이는 기계의 눈이 사람의 눈보다 정확하기도 하지만, 이미 프로야구에서 드러났듯이 사람 심판은 특정 팀에 매수당할 수도 있고 편견도 가질 수 있는 반면 기계는 그런 결점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즉 기계의 눈은 공평무사하다.

여기서 불량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나쁘다’ ‘잘못됐다’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불량’이라고 하면 정성적인 차원에서 생각한다. 불량한 인간은 성질이 못된 인간이다. 불량식품은 더럽고 해로운 것이 들어 있는 식품이다. 그러나 부품 검사장치가 찾는 불량은 철저히 정량적인 것이다. 즉 정해진 규격을 벗어난 것은 무조건 불량으로 치는 것이다. 물론 ‘규격을 벗어났다’라는 것은 일률적인 것은 아니며 다양한 기계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기도 한다. 불량이란 결국 노이즈의 개념이다. 노이즈를 폭넓게 정의하면 원하는 시그널 이외의 모든 신호이다. 따라서 검사장치는 전자부품이 가진 형태와 재질, 색깔의 특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노이즈로 친다. 물론 어느 정도의 노이즈를 잡아낼 것인가 하는 범위는 사람이 지정해 줘야 한다. 너무 세밀하게 검사하면 불량률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검사장치가 찾는 불량은 금이 간 것, 구멍 난 것, 칠이 벗겨진 것, 전극이 드러난 것, 모서리가 깨진 것, 표면이 오염된 것, 흠집, 길이나 폭, 두께가 부정확한 것 등이다. 그러나 검사장치가 이런 특징들을 미리 알고 있다가 칩의 패턴을 인지해서 대조하는 식으로 불량을 찾는 것은 아니다. 검사장치는 픽셀 단위로 나타난 영상의 노이즈를 찾아낼 뿐이다. 그 노이즈를 알고리즘을 통해 해석하여 불량 판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물질을 찾는 방식은 특정 영역의 픽셀의 밝기가 정도 이하이면 이물질이 개입한 것으로 판단한다. 즉 ‘이물질’이라는 것 자체를 찾는 것이 아니다. 갈라진 크랙은 미분을 이용해서 찾는다. 즉 n번째와 n+1번째 픽셀의 차이값이 nn보다 크면 크랙 불량의 후보로 치는 것이다.

검사의 절차는 공급(feeding), 검사(inspection), 제외(sorting)의 세 단계로 나뉜다. 검사할 칩을 카메라 앞까지 날라 주는 피더(feeder)는 칩을 빨리 보내야 하지만(1분당 최대 8,000개) 정확하게도 보내 줘야 한다. 즉 카메라가 검사하고자 하는 면이 드러나도록 각도를 맞춰 줘야 하는 것이다. 칩의 공급 경로상에는 칩이 똑바로 놓이도록 각도를 바로 잡아 주는 가이더가 1차와 2차로 나뉘어 설치돼 있다. 두 차례의 가이더를 통과한 칩들은 일정한 각도로 공급된다. 선형의 피더를 빠져나온 칩들은 유리로 된 턴테이블 위에 올려진다. 턴테이블은 회전하면서 칩들을 조명과 카메라로 이루어진 광학계로 옮겨 준다. 전자부품 검사장치의 카메라는 철저한 검사의 스펙에 따라 사용되기 때문에 사용자의 취향이나 감성에 따라 다양한 세팅이 가능한 일반적인 카메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실 일반인의 카메라는 사용자의 눈과, 나아가 눈을 가지고 있는 몸 전체와 한 덩어리를 이룬다. 그래서 카메라는 몸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면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검사장치의 몸은 땅바닥에 수평을 맞춰서 단단히 고정돼 있다. 즉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턴테이블에 놓인 칩은 1차 가이더와 2차 가이더를 통과한다. 정렬부가 두 개 있는 이유는 칩이 1차 정렬부를 통과한 후에 자세가 올바르지 않을 경우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다. 그렇게 해서 똑바로 놓은 칩은 트리거 센서를 통과한다. 트리거 센서는 칩의 위치를 기록한 후 특정한 상대 거리에 있는 카메라에게 자동으로 찍으라는 명령을 주는 신호를 인코더값을 통해 알려 준다. 여기에는 칩의 속도와 센서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 같은 수치들이 계산된다. 그다음 칩은 검사부로 넘어간다. 검사장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특정한 상대 위치와 읽힌 인코더값에 의해 칩이 도착했다는 신호가 오면 계산에 의한 인코더값을 읽어서 카메라가 사진을 찍는다. 윤한종은 1.0×0.5mm 크기의 전자부품의 경우는 픽셀당 4.9㎛의 해상도를 가지는 1.5배율 렌즈를 써서 6W의 적색·녹색·청색 LED를 각각 다른 각도로 비춰서 찍었다. 조명의 강도와 각도도 중요한데, 전자부품의 표면에 있는 불량을 찾아내려면 옆에서 비스듬히 빛을 비추어 요철이 잘 드러나게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0.8배율 렌즈라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크기가 1mm도 안 되는 전자부품을 0.8배율로 찍는다는 것은 거의 현미경적인 수준의 확대율이다. 찍힌 이미지는 영상처리 알고리즘을 통해 해석되어 정상, 불량 여부를 가리게 된다. 불량으로 판단된 칩은 압축공기가 불어서 불량통으로 빠진다. 통은 세 가지가 있는데, 정상품이 들어가는 통, 불량품이 들어가는 통, 그리고 다시 한 번 검사해야 할 칩이 들어가는 통, 즉 패자부활전을 기다리는 통으로 돼 있다.

윤한종은 자신이 개발하고 판매하는 이 검사장치를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어냈다. <보이지 않는 존재(Invisible Beings)>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들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1.0배의 배율로 찍은 칩 10,000개를 나열한 것으로, 작은 칩들의 이미지 10,000개가 나열된 모습은 마치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정확하고 엄격한 생산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전자부품에 불량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이질적인 요소들이 가득 찬 혼란의 도가니인 사회는 얼마나 심한 혼란의 도가니인가 생각하게 해준다. 사회에도 학교 입시나 회사 입사, 교원 선발 등 사람을 거르는 엄격한 필터링 시스템이 있으나 불량 인간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은 작은 전자부품의 세계와도 닮은 점이다.

또 한 가지의 작품은 개별적인 전자부품을 극단적으로 확대한 것이다. 400배 정도 확대된 부품들은 이제는 부품 아닌 다른 것으로 보인다. 검사장치의 카메라와 렌즈로 고배율로 확대하여 찍은 전자부품은 전자부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무껍질이나 딱정벌레를 닮기도 했다. 워낙 미세한 세계를 확대해 놓으니까 육안으로는 원래 사물의 정체를 알아보기 힘든 것이다. 전자부품의 표면은 육안에는 매끈해 보이지만 고배율로 확대해 놓으니까 온갖 금속의 입자들이 대단히 불규칙하게 울퉁불퉁하게 배열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모습은 차라리 자연에서 발견되는 바위의 표면에 가깝다. 그것은 산업부품이 초정밀로 규격화되어 있고 가공돼 있을 거라는 믿음을 배신한다. 결국 실수와 실패는 아무리 첨단기술이 발달해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배율로 찍은 전자부품의 모습이 처음부터 그런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시각적으로 자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면 검사장치가 잡아낸 불량의 모습은 특정한 파라미터에 걸린 것일 뿐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잘못됐다’, 혹은 ‘엉망이다’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전자부품의 불량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불량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래서 윤한종은 자신의 ‘작업’에 인간적인 개입을 한다. 즉 산업적으로 생겨난 이미지는 우리가 기대하는 스펙터클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뭔가 관심의 흔적을 넣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농도의 질산을 사용하여 내부 전극을 부식시키기도 하고 금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액체인 왕수(질산(HNO3)과 염산(HCl)을 1:3으로 섞은 것)를 사용하여 부식시키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Invisible Beings)’라는 제목은 네덜란드에서 1590년에 현미경이, 1608년 망원경이 발명된 이래로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색해 온 인간의 노력을 압축하고 있는 제목이기도 하다.

이렇게 제목이 붙은 ‘작업’은 ‘작품’이 되면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예술의 제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과학기술과 예술의 융합’의 한 사례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말도 틀렸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과학기술과 예술의 융합이란 말은 서로 동떨어져 있는 과학과 예술의 강제 결혼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과학기술과 예술을 융합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과학기술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술은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온 적이 없다. 과학기술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말이 풍기는 또 다른 뉘앙스는 예술이 과학기술을 응용하는 경우다. 온갖 천연재료를 이용하여 물감을 개발하던 고대에서부터 예술은 과학기술을 응용해 왔다. 다양한 첨단기술을 사용하는 오늘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윤한종의 ‘작업’도 이런 범주에 들까? 그렇지 않다. 윤한종의 작업을 얘기하는 데 ‘과학기술과 예술의 융합’이란 말은 적당치 않다. 처음부터 과학기술 속에 예술이 들어 있고 예술 속에 과학기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양자는 따로 있다가 만나서 융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제도가 발달하여 별개의 존재로 인식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윤한종의 작업에서 양자가 어떤 식으로 섞여 있었던 것일까? 대부분의 기계가 그렇지만, 잘 관찰해 보면 예술작품만큼, 혹은 그 이상 아름답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창의성과 감성, 제작의 치밀함이 기계에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전자부품을 아주 빠른 속도로 이동시키면서 올바른 자세로 놓여 있게 해주는 피더와 가이드의 메커니즘은 정교할 뿐 아니라 아름답다. 그 메커니즘을 이루는 금속부품은 스케일은 아주 작을지언정 그 표면의 질감이나 광택은 헨리 무어의 조각품 못지않은 깊은 맛을 풍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금속은 일본표준협회(JIS)가 정해 놓은 Steel Use Stainless, 즉 SUS 규격에 따라 가장 적합한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RGB 세 가지 색상의 LED는 전자부품 표면의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각도와 조도로 설치돼 있어서 어떤 결함도 찾아낸다. 그것은 인간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도달하고자 했던 무엇이든 보아내는 눈의 첨단적인 형태이다. 마지막으로, 검사된 칩이 들어갈 통도 습기가 차지 않도록 환기가 되고 있으며 압축공기가 칩을 불어 낼 때 너무 세게 밀지 않도록 압력이 조절돼 있다. 그리고 칩이 통으로 떨어질 때 충격으로 손상되지 않도록 스펀지가 붙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세심한 배려와 감각적 배치의 결과로 나온 이미지는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풍긴다. 수백 배로 확대된 전자부품은 우리 삶을 이루는 중요한 기기들의 세포답게 회로의 작동이라는 생명력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어떤 기계든 동력을 잃으면 빛도 잃고 움직임도 사라지는데, 거기에 연료든 전기든 동력을 공급하고 스위치를 넣어 주면 생명을 부여받은 듯이 빛을 내기 시작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며 살아난다. 이 모든 것이 작은 전자부품이라는 세포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전자부품 검사장치는 그 세포들이 앞으로 회로 속에 들어갈 때 잘살게 될지 검사하여 확인하는 기계이다. 항공기가 하늘을 날거나 배가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상태를 갖추는 것을 감항성(堪航性, airworthiness, seaworthiness)이라고 하는데, 전자부품 검사장치는 작은 소자의 감항성을 검사해 주는 기계이다.

이 기계를 만들고 관리하는 과정에 수많은 문제들이 드러나는데, 엔지니어인 윤한종은 그때그때 그것들을 해결해야 한다. 문제들은 매뉴얼에 나오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윤한종도 창의력을 가지고 문제들에 대처해야 한다. 때로는 클라이언트가 새로운 요구를 해올 때도 있다. 그때도 윤한종은 창의적으로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자부품 검사장치는 예술작품 이상으로 창의성의 산물이다. 이 복잡한 기계 속에서 예술은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구현돼 있다. 따로 기계의 바깥에 있는 어떤 예술을 굳이 찾아서 결합해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기존의 사진 작업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1920-30년대에 유럽과 미국 양쪽에서 대상의 디테일이 가진 기묘한 아름다움에 파고든 사진가들이 나왔다. 유럽에서는 독일의 칼 블로스펠트(Karl Blossfeldt)가 다양한 식물의 디테일을 확대 촬영하여 ‘자연 속에 들어 있는 예술형상’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만들었다. 신객관주의(Neue Sachlichkeit)라는 사상에 입각하여, 블로스펠트는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의 객관성을 추구했다. 미국에서는 폴 스트랜드(Paul Strand)가 기계의 질감과 구조미에 매료돼 있었다. 독일의 사진가들처럼 그도 자신의 주관성은 억제하고 오로지 대상에 들어 있는 특성만 강조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과학기술은 곧 예술 자체였다. 양자는 다 창의성의 산물이고 인간이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스펙터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런 맥락에서, 윤한종이 만들어낸 이미지 속에는 과학기술과 예술이 서로 뒤섞여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정확한 검사를 통과한 전자부품도 회로에 자리 잡기 전까지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윤한종의 사진에 나오는 전자부품들은 아직은 의미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개별적인 세포들일 뿐이다. 언어로 치면 글자 하나인 것이다. 그것이 의미의 세계를 이루려면 문장을 이루어야 하는데 윤한종의 경우 문장은 회로 혹은 알고리즘이다.

윤한종의 작품은 원래의 부품 검사장치와는 다른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욕망의 알고리즘이다. 원래 전자부품은 기계의 욕망이 궁극적으로 실현된 산물이다. 규격대로 잘 만들어져서 잘 기능하고 작동하여 이 세계를 기계의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기계의 욕망이다. 그 욕망은 애초에 기계를 만든 인간의 욕망마저 양적, 질적으로 초월하여 인간이 기계를 두려워하는 세상이 오고 말았다. 기계의 욕망이란 원래 인간이 기계를 만들어서 사용하고 싶은 욕망이었으나 이제는 기계 자체가 주체가 되어 이 세상을 기계 천지로 만들려는 욕망이 됐다. 이제는 인간의 욕망과 기계의 욕망을 구별하기 힘들게 됐다. 욕망하는 인간은 여러 가지 기계장치들의 도움을 받아야 욕망을 실현할 수 있고, 기계도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날고자 하는 욕망이 비행기를 만들었고 빛에 대한 욕망이 전구를 만들었으며 더 크고 강한 두뇌에 대한 욕망이 컴퓨터를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모든 기계들은 인간 욕망의 산물이다. 그러나 무작정 자기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주관적인 욕망만으로는 이런 것들은 실현되지 않는다. 인간이 기계 자체의 객관적 성질에 맞춰서 욕망을 제어하고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어야 기계의 욕망은 실현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은 소수 천재의 머리가 아니라 거대하고 복잡한 산업 시스템이다.

우리는 흔히 산업시스템이 똑같은 물건들을 찍어 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정밀하게 가공해도 오차가 없는 기계나 부품은 없다. 그 오차가 비록 1,000분의 1mm 단위의 것이라 해도 오차는 오차다. 다만 부품의 허용치가 오차 범위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존재론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근대 이래 서구의 사상이 집중해 온 것은 동일자(the identical)의 문제였다. 즉 분열된 인간을 하나의 통일된 존재로 규정하려는 것이었다. 나의 외부에서 나와 같은 것을 찾아서 존재의 통합성을 추구하는 것이 동일자의 철학이었다. 그런데 개별 인간만 분열된 것이 아니라 세계도 분열돼 있다. 인종적으로, 지리적으로,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분열돼 있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분열된 세계 속에서 동일자를 찾고 그 안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타자(the other)로 규정해 버렸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남이가’의 철학을 가지고 ‘우리’라고 동일시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타자라고 내쫓아 버렸다. 그게 서구 근대의 역사다. 그것은 사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세계를 실제로 동일자들의 터전으로 만드는 실천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 사상과 실천의 역사는 근대 산업에 와서 제대로 실현되는 듯이 보인다. 인간의 의도대로 동일한 것을 마구 찍어 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산업제품들은 대강 보면 다 똑같은 것 같다. 그러나 바싹 들여다보면 가공오차가 있고 불량이 있다. 그래서 동일자의 철학은 아주 미세한 차원에서 금이 간다. 윤한종의 작품은 바로 그런 심오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결국, 기계의 욕망은 금 간 욕망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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